• 어떤 스타크래프트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
    ESSAY 2023. 12. 3. 20:29

    기억이 맞다면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시작한 건 중학생 때이고, 지금까지도 점심시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하고 있으니 꽤 오랜 기간 즐기고 있다.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는 서머셋 몸의 말처럼, 이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같은 게임을 하게 되면 그것을 통한 철학이나 관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 같다. (실력이 늘지 않은 건 함정..)

    게임을 시작하면 지도상에는 내 진영만 보이고, 그 외 지역은 안개로 덮여 길이 어디에 있는지 상대방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정찰하기 전 까지는 상대방의 위치나 전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찰병을 통해 안개로 덮인 지역을 조금씩 밝혀 나간다. 길이 없기 때문에 막다른 곳을 만날 때도 있고 운 좋게 자원이 풍부한 땅을 발견할 때도 있다. 어찌 되었든 안개로 덮인 지역을 밝히고 길이 만들어지면 다음부터는 조금 더 편하게 다닐 수 있다. 하지만 가리워진 길 어딘가에는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 있을 수도 있다.

    자원을 모으고 병력을 생산하고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들을 하게 되는데, 왠지 내가 방금 한 실수 때문에 상대방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 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이 생기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이 끝나고 리플레이를 보면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던, 게임 내내 걱정하고 좌절했던, 그 근거 없는 불안요소는 사실은 게임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상대방 또한 나와 비슷한 실수를 한다. 더 많이 하기도 한다. 사소한 걱정과 좌절 속에서 제일 중요한 승부처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 순간에 집중하지 못해 패배하기도 한다.

    가끔은 사소한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때도 있다. 실수를 줄이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실수한 이후의 자세도 중요하다. 앞으로는 실수로라도 절대로 적이 설치한 지뢰를 밟지 말라고 말하는 것보다, 실수로라도 절대로 밟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변경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중요한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패배한 게임의 리플레이를 보는 것이다. 진 경기의 리플레이를 보는 것은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그리 쉽지 않지만, 리플레이를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또한 경기에 패배한 사람이 승리한 사람에게 gg(good game)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게임에서 나가는 문화가 있다. ‘좋은 경기였고 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이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물론 안 남기고 나가는 사람이 더 많지만) 어려서부터 이기는 방법만을 배우고 승자만이 독식하는 경쟁사회 속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직간접적으로 배우지만, 멋있게 지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아침 7시쯤 친구에게 받은 메시지를 보고,
    오랜만에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들으면서
    의도치 않게 도달하게 된 아재 게이머의 스타크래프트와 인생의 개연성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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