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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캐나다에 관한 미신ESSAY 2023. 12. 22. 20:24
문득 한라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이었다. 한라산에 대해 알고 있었던 정보라면 제주도에 있다는 것과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것뿐이었다. 평소 등산을 좋아했었던 것도 아니었다. 둘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한다면 아마도 싫어하는 쪽이겠지만, 우리나라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정상에 서면 나에게 깨닮음을 줄 무언가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친절히 만나 줄 것만 같았다. 소위 말하는 나를 찾고 싶다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라산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후 인터넷이나 책에서 한라산에 가기 위한 여러 가지 정보를 모았다. 혼자 가기엔 좀 심심할 것 같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혼자 여행한 적도 없었기에 친한 친구 둘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내심 같이 가주길 기대했지만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가지 말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들이 하나둘씩 내 안에 생겨났고, 결국 한라산 등반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것들을 주장하거나 과감히 선택하기보다 눈치 보거나 포기하는데 익숙했다.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이 다급하게 산에 올라가 나를 찾아야 했던 이유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대학에 가면 훨씬 자유롭고 다양한 선택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동안 삶의 주인으로서 살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정답이라고 정해진 것들을 믿고 따르며 안정감을 느끼는 것에 길들여져 왔기에, 앞으로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그동안 배우지 못한 것을 빠르게 얻어야 한다는 다급함 그리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이 한라산이라는 미신을 믿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을 하였다. 고등학생 때 꿈꾸었던 자유로운 삶과 현실 사이엔 괴리가 있었다. ‘내 의지로 나의 행복을 위해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지?’라고 물었을 때 가능한 대답은 학교 식당 점심메뉴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동안 해왔던 일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모두 정해 놓았다고 느껴졌고, 그 일들은 현재의 나보다는 미래의 나를 위한 희생이었으며, 비록 지금 행복하진 않지만 미래의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그때의 나는 과연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었다.(무언가를 얻었을 때의 행복이 그리 오래가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의문과 불만이 많았지만 그 틀 안에서 벗어나지도 적응하지도 못했다.
답답한 생각들 중에 우연히 캐나다 유학을 지원해 준다는 교내 공고를 보게 되었다. 프로그래밍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영어학습을 위한 유학비를 지원해 주고 캐나다에 있는 IT회사로 인턴이나 알바를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공고를 보았을 때도 문득 캐나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매일 반복되는 한국에서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고등학생 때처럼 캐나다에 도착해 한동안 살다가 오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외에 특별히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동안 하고 싶긴 하지만 지금 꼭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미래에 도움도 안 될 것 같은 선택들을 포기하거나 정당화할 때마다 느꼈던 나를 잃어가는 듯한 상실감 또는 무력감과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들이 나를 이끌었고, 앞으로 해야만 하는 쌓인 일들이 멈추게 했지만, 그곳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떠나기 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외부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한라산 때처럼 친한 친구들에게 의지하여 가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도 가고 싶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지만;)‘577 프로젝트’라는 영화가 있다. 제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배우들이 서울에서 해남까지 577km를 걷으며 일어나는 일들을 담은 영화이다. 그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배우들이 목표지점인 해남에 결국 도착하였을 때 김성균이라는 배우가 한 말이었다. “해남에 도착하면 무엇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네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나는 결국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고등학교 때 만나길 기대했던 깨달음 같은 것은 물론 그곳에 없었고 안개에 덮여 희미하게 보이는 백록담이 대신하고 있었다. 가끔 날씨가 좋아 한라산이 잘 보일 때면 그때 혼자 산에 올랐다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하곤 생각한다. 캐나다 생활의 결과로 내 인생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의 선택으로 나에게 좀 더 솔직해질 수 있게 된 것 같고 나에 대한 책임감이 조금 더 늘어난 것 같다.
행복은 상태가 아닌 과정이라는 말은 높은 산을 오른다거나 긴 여행을 한 결과로써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찾게 된다기보다는 마음이 가는 일들을 용기 있게 선택하고, 선택을 책임지고 즐기는 과정들이 쌓이게 되면서 남들과 다른 내가 만들어진다는 의미와도 통할지 모르겠다.728x90'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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